bulletin

한국융연구원 회보 '길'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작성자 정찬승
발행일 2003년 2월 28일
권호 제4권 1호
ㆍ조회: 2629  
IP: 222.xxx.211
西蕉칼럼 - 새해의 길목에서

 

새해의 길목에서

 

  틱낫한 스님의 플럼빌리지에는 1250그루의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그는 그 넓은 농장을 천천히 걸으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며 연꽃이 있는 연못에 다다르면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한걸음 한걸음 내 딛는 발걸음과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느끼며 순간을 철저하게 의식하며 걸어야 한다고 한다미래도 과거도 아니고 순간 순간을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사는 것' 그것이 그가 지향하고 남에게도 권하는 삶의 길이라고 한다.

  새해 아침 혜화동 집에서 성북동 연구원으로 가는 눈 덮인 성곽길을 걸으며 나는 조간신문에서 읽은 틱낫한의 명상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머리에 떠올리고 있다연구원까지의 길은 보통걸음으로 약 십삼분 거리이다도중의 횡단보도에서 지체된다 하더라도 십오 분을 넘지 못한다내가 가는 이 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틱낫한이 말하듯 순간을 깨어 있고자 집중한다면 얼마나 많은 귀중한 순간들이 이 길에 놓여 있게 되는 것 일까그 순간과 순간이 이어질 때 십삼 분, 십오 분은 영겁으로 이어질 터이다그런데 나의 머리는 잡다한 일상사와 느닷없는 기억의 조각들로 어수선하고 나의 가슴엔 아직도 욕심이 꿈틀거린다

  틱낫한은 프랑스 한 귀퉁이 시골에 ‘무릉도원’을 만들었다그는 전세계 사람에게 증오심을 이기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그가 하는 일은 또 하나의 작은 종교공동체운동, 하나의 시민의식개혁운동이라 할 것이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틱낫한의 통찰은 숫한 박해와 고통 속에서 스스로 겪은 증오심과의 싸움에서 얻은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그의 말에는 감상이 없고 그의 방법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그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치료사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현상, 히스테리성 환자의 자기연민이 원한과 증오감을 무한대로 증폭시킨다는 사실을 경험하였음에 틀림없고 인간은 누구나 때에 따라선 그런 극화劇化 dramatization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그리고 이 중독현상 같은 자학과 고통의 극화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상처가 있다현대를 사는 한국사람에게도 대를 이어 내려오는 상처가 있다오백 년, 천 년 된 과거의 상처를 아직도 긁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현재의 문제를 호도하기 위해 ‘과거의 상처’에 매달리는 경우도 있다그러나 멀리는 외세의 침략과 주변 강대국에 의한 굴종, 특히 일제 35년의 압제아래서, 가깝게는 6.25 한국전쟁의 동족상잔에서, 그 뒤에 일제강점기보다도 긴 36년의 군사독재통치아래서, IMF의 한파 속에서, 민주화의 시행착오과정에서 주고 받은 수많은 상처들이 있다.

  그런데 상처가 원한이 되면 원한은 한풀이로 또 다른 한을 남에게 심어준다.

한恨의 극화와 한풀이의 굿판은 계속되어도 한풀이만으로는 분노의 카르마는 해소되지 않는다때로는 권력집단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증오감을 부추기는 경우조차 있다증오와 적개심은 ''을 무찌르고 공격 하는데 쓰이는 아주 긴요한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사람들은 이 경우 밖에 있는 ‘적’을 보고 정작 자기 마음 안의 ''을 보지 못한다밖의 ‘적’을 무찌른다 해도 얼마 안 가서 내부의 적에 의해 정복당하게 마련이다

  증오와 원한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외눈박이처럼 세상의 한 면 밖에 볼 수 없다세상의 어둠, 절망, 불의와 부패만 눈에 띌 것이다사람과 세상의 밝은 면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증오에서 나온 어떤 행동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또 하나의 증오의 씨를 뿌리는 결과를 빚을 뿐, 인간전체를 포용하기에 이르지 못한다하나의 극이 다른 극으로 대치될 뿐이다.

  오직 ‘깨어 있음’으로써, 자신의 마음속에서 증오의 씨앗, 한의 응어리를 발견하고 직면함으로써, 세상을 넓게 전체로서, 그 아름다움과 보람과 희망을 그 어둠과 함께 보게 된다분석심리학의 용어로는 ‘무의식적 그림자의 의식화로써’, 혹은 “‘자기의 인식을 통하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세계가 한풀이와 복수의 소용돌이에서 한치도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새해 새아침에, 이제 어둠을 헤치고 동녘에서 떠오르는 저 태양처럼 그렇게 환한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내딛는 걸음마다 틱낫한이 권한 순간의 경이로움을, 평화와 미소를 길게 음미해 보자.

 

(西蕉 李符永 院長)

 

발행일 권호
14 융의 어록 2003년 2월 28일 제4권 1호 2971
13 西蕉칼럼 - 새해의 길목에서 2003년 2월 28일 제4권 1호 2629
12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페르조나 Persona 2002년 8월 31일 제3권 1호 4783
11 융의 어록 2002년 8월 31일 제3권 1호 3170
10 西蕉칼럼- 월드컵 이후 우리의 과제 2002년 8월 31일 제3권 1호 2606
9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그림자 Shadow 2001년 12월 31일 제2권 2호 4323
8 융의 어록 2001년 12월 31일 제2권 2호 3001
7 西蕉칼럼 - 우리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 2001년 12월 31일 제2권 2호 3632
6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콤플렉스, Komplex, Complex 2001년 7월 31일 제2권 1호 5025
5 융의 어록 2001년 7월 31일 제2권 1호 2942
4 西蕉칼럼 - 숲속으로, 꽃길을 따라 2001년 7월 31일 제2권 1호 3358
3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투사(投射 Projection)란? 2000년 12월 30일 제1권 1호 8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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