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etin

한국융연구원 회보 '길'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작성자 정찬승
발행일 2005년 4월 13일
권호 제6권 1호
ㆍ조회: 3539  
IP: 222.xxx.211
西蕉칼럼 - 原因論에서 條件論으로

 

原因論에서 條件論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그 원인을 찾는다. 왜 그것이 일어났는가? 하고.― 인간은 느닷없이 일어나는 그 알 수 없는 사건에 대하여 원초적인 불안과 공포, 때로는 호기심을 느낀다. ‘모르는 것’, ‘이상한 것’은 아예 보지 않고 피하든가, 반대로 어떻게든 해석해서 그 알 수 없는 현상의 원인을 캐내야만(그것이 틀렸더라도) 안심이 된다. 인류의 문명은 인간의 이러한 원인추구행태에 힘입어 발전해 왔다. 일식, 월식이 왜 생기는지, 왜 지구가 태양을 도는지, 페스트가 나쁜 귀신이나 오염된 공기, 또는 죄악 때문이 아니고 페스트균에 의해 발생되며, 마녀魔女란 사실은 히스테리성 신경증 환자였다는 사실 등, 불확실하던 수많은 것이 ‘확실히’ 밝혀졌다.

  이러한 원인론적, 혹은 인과론적 관점은 의료의 역사에서는 세균이 발견되고 병리학이 발달되기 시작한 19세기의 실험실의학에서 최고조에 달했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자연과학으로서의 의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로 인하여 많은 획기적인 발견과 의술의 발달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동서양의 고대의학이 개발했던 지혜로운 접근법, 즉 질병을 일으키게 된 여러 조건간의 상관성, 병행요인들을 살펴보는 태도를 소홀히 하게 되었고 아예 의학방법론에서 제외되는 경향이 생긴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른바 신체의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병인이 불확실한 정신질환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의학에서는 그래도 이러한 조건들을 ‘소인적素因的 요인’이니 ‘원인적 요인’, ‘기여요인’등의 이름으로 인정하고 총체적 의료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여기에도 복합적인 증후를 한 두 가지 원인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여전하고 생물학적 연구 성과에 힘입어 최근에는 “모든 정신질환은 뇌의 병”이라고 한 19세기 독일정신의학의 체인론体因論Somatism이 부활하는 느낌마저 있다.

  전문가가 이럴진대 일반대중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한국 대중사회의 집단적 사고의 특징은 19세기 유럽의 인과론적 태도와 비슷하다. 원인은 될수록 구체적이며 명료해야 하고 하나로 압축되어야 믿을 만 하다. 원인이 여러 개이면 그것은 원인도 아니라는 암묵의 기준이 있다. 여기에는 ‘이것 아니면 저것’(Entweder-oder)이라는 배제의 원리가 있을 뿐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Sowohl A als auch B ) 통합의 원리가 없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고 하면 벌써 어렵다고 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하는 뺄셈 사고로는 이 대답이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결국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무엇을 잘 모르는 사람이고 그 병은 원인을 아직 모르는 병이라고 단정짓는다. 동양의 전통문화의 값진 지혜인 음양의 상대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할 한국인이 말이다.

  대중은 일단 이것이 원인이다 하는 결론이 나면 그것으로 하나의 신앙을 만든다. 내 병은 어릴 때 상처 입은 탓이다. 엄격한 아버지 탓이다―. 그런 믿음은 매우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주변의 한 사람을 탓으로 돌리면 자신의 책임은 회피해도 좋기 때문이다. 신경증환자가 곧잘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신경증환자가 아닌 이른 바 전문가조차 이런 벙법을 사용하면서 만족해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발병에 기여한 많은 조건들을 무시하고 이렇게 하나의 원인에 집착할 때, 그는 결코 문제의 전체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문제의 일부를 전체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한다. ‘원인’이라고 내세우는 것도 흔히는 진정한 원인이 아니고 원인론에 투사된 자신의 무의식의 감정적 콤플렉스에 불과하다.

  C.G. 융은 정신분열증의 병인론과 관련하여 이 병은 하나의 원인에 귀착시킬 수 있는 병이기보다 소인, 정서적 충격, 뇌의 생리적 변화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생기는 것 같다고 하면서 원인론 보다는 조건론(conditionalism)이 이병을 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놀랍게도 ‘원인’cause이니 ‘인과론causality이니 하는 용어는 의학에서 지워버리고 그대신 조건론을 대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까지 말했다. 그 뒤 정신분열증의 뇌영상학적 신경생리학적, 정신약물학적, 유전학적 연구가 진행되어 생물학적 요인이 많이 밝혀지고 이 병에서는 기본적으로 약물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유일절대의 원인이 없는 이상 이 병에 대한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론은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환자의 재활, 삶의 질의 향상까지를 목표로 하는 임상가라면 이런 다각적인 조건론적 시점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정신분열증은 뇌의 병이다. 부모 탓이 아니다.” 혹은 “우울증은 뇌의 병이다.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약을 먹어야 한다.”는 식의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해온 대중계몽방법이 얼마나 단순한 논법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논법이 어느 면에서 분명 의료계몽으로 효과적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나에 치우친 주장은 다른 하나의 반동을 불러 드리게 마련이고 치료자나 환자는 단순화된 논리 때문에 치료범위를 스스로 제약하는 격이 된다. 즉 뇌의 병이라는 원인론 때문에 약물치료 이외의 방법으로, 혹은 이와 병행하여 환자를 전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조건론이란 병이 발병하거나 악화되는 여러 조건들을 중요시하는 관점이다. 물론 조건론이라 하여 원인론을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염질환처럼 여러 조건 가운데 그 조건이 없으면 절대로 발병하지 않는 병도 있다. 그러나 정신질환은 말할 것도 없고 신체질환에서 조차도 총합적 전인적 치료가 강조되는 것은 발병조건이나 악화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어야 재발을 막고 또한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인들은 우리의 사회문제를 어떤 시점에서 보고 있는가. 문제가 일어나게 된 조건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그 조건의 개선 없이 대중적인 단세포적 감각에 영합하여 겉에 드러난 몇 가지 ‘원인’이라고 하는 것만 처리하고자 한다면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악화될 우려가 있다.

  대중의 의식수준을 끌어올리는 의료계몽과 교육, 나가서는 정책수행이 매우 중요한 때이다. 그러자면 視點의 근본적인 전환과 복잡한 문제를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사고력, 끈기, 인내력을 누구보다도 대중교육에 간여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것이다

 

<西蕉 李符永 원장>

 

발행일 권호
26 융의 어록 2005년 4월 13일 제6권 1호 3311
25 西蕉칼럼 - 原因論에서 條件論으로 2005년 4월 13일 제6권 1호 3539
24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심리학적 유형 (3) -사고형(思考型) Thinking type 2004년 9월 15일 제5권 2호 5618
23 융의 어록 2004년 9월 15일 제5권 2호 3033
22 西蕉칼럼 - 여름을 보내면서 2004년 9월 15일 제5권 2호 2858
21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심리학적 유형 (2) -외향형/내향형 2004년 3월 8일 제5권 1호 4610
20 번역가를 위한 노트 Notes for Translators 2004년 3월 8일 제5권 1호 4524
19 西蕉칼럼 - 봄은 오고 있다 2004년 3월 8일 제5권 1호 2732
18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심리학적 유형 Psychological Types (1) 2003년 9월 30일 제4권 2호 5419
17 융의 어록 2003년 9월 30일 제4권 2호 2773
16 西蕉칼럼 - ‘융’을 번역하면서 Translating Jung's Basic Works 2003년 9월 30일 제4권 2호 2891
15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개성화 Individuation (자기실현) 2003년 2월 28일 제4권 1호 3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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