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etin

한국융연구원 회보 '길'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작성자 정찬승
발행일 2004년 9월 15일
권호 제5권 2호
ㆍ조회: 2859  
IP: 222.xxx.211
西蕉칼럼 - 여름을 보내면서
 

여름을 보내면서

 

  금년에는 '정식'으로 꽃농사를 해 볼 요량으로 묘판에 꽃씨를 뿌려 방 안에서 길렀다가 이른 봄에 밖에 내다 심는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꽃이라야 해바라기, 옥잠화, 채송화, 봉선화, 표주박, 호박, 수세미 같은 평범한 것들이다. 동대문에 가서 씨앗을 사와서 묘판을 만들고 우선 해바라기와 옥잠화의 씨를 뿌리고 2층 서재의 창가에 갖다 놓고 물을 주었다.

  파란 싹이 트고 키가 자라기 전까지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해바라기는 콩나물처럼 키만 크더니 잎사귀 무게도 지탱하지 못한 채 허리가 이리 휘고 저리 휘고 구부러져서 도저히 제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방이 너무 덥고 햇볕은 부족한데 물만 지나치게 많이 준 탓인 듯하다.

  그래서 나는 봄이 제법 지난 다음에야 새로이 화분에 직접 씨를 뿌려 이층 베란다에 내놓았는데 해바라기와 표주박, 채송화, 봉선화가 한참 만에 싹이 났고 해바라기는 솎아 주고 한 화분에 하나, 또는 두 그루씩 여러 화분에 나누어 심은 뒤 거름을 듬뿍 주고 물을 주었더니 글자 그대로 무럭무럭 자라 사람 키를 훌쩍 넘어버렸다. 봉선화, 표주박도 잘 자라 꽃을 피웠고 뒤늦게 정신 차린 한 무더기의 채송화는 색동저고리 같은 화사한 꽃을 자랑스럽게 펼쳐 보였다.

  해바라기는 크느라고 무척 목말라 했다. 하루도 물을 주지 않으면 잎사귀가 축 늘어진다. 그래서 틈틈이 베란다에 올라가서 물을 부지런히 주었다. 드디어 일곱 그루의 해바라기가 두세 개의 노란 꽃을 태양을 향해 활짝 피우던 날, 제일 좋아한 것은 유치원 다니는 외손자와 그의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해바라기를 보기 위해 이층 베란다에 올라가 화분 사이를 누비며 환성을 올렸다 한다.

  작은 뜰에는 내가 담당한 화단이 있다. 그곳에는 본래 원추리와 붓꽃이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붓꽃이 금년에는 원추리와 다른 식물에 눌려 잘 자라지 못하고 꽃도 피우지 못했다. 나는 그곳에 예년처럼 콩을 심었고 산에서 거둔 나팔꽃 씨를 뿌렸는데 두 그루의 분꽃이 거름을 혼자 다 독점하여 엄청나게 커져서 꽃을 피우는 바람에 새로 싹튼 콩이 잘 자라지 못했다. 꽃이 달린 것이라 분꽃을 뽑지는 않고 우거진 꽃가지를 더러 꺾어서 햇볕이 통하게 해놓고 콩 넝쿨이 줄을 타고 올라가게 해 두었지만 콩은 영 기운을 쓰지 못했다. 금년에 콩 농사는 틀린 것 같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상생(相生)이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구나 생각했다. 식물의 세계는 사람보다도 더 치열한 것인가. 나팔꽃은 뻗어 올라갈 데를 몰라 자기네끼리 막 뒤엉키면서 주변 식물을 마구 얽어 맸고 이 작은 뜰에도 식물들의 소리 없는 전쟁이 진행중이다.

  넝쿨식물이란 도무지 외골수여서 위로 위로 올라가는 것만 알고 있는 것 같다. 줄을 매서 좌우로도 가게끔 유도해도 절대로 옆으로 가는 법이 없다. 나팔꽃도 콩도 표주박도 모두 일제히 더 높은 곳을 향해 끈질기게, 또 줄기차게 올라간다. 그것은 꼭 우리 민족의 끈질긴 향학열과 타협을 모르는 고집불통의 성향을 닮았다. 그러나 열매를 맺으려면 올라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편안한 초가지붕처럼 태양을 한 몸에 받으면서 꽃을 피우고 수정되고 열매를 맺는 결실을 위한 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장마가 지날 무렵 7월 중순부터 8월초까지 꽤 긴 여행을 하고 돌아왔더니 화단의 여름꽃들은 다 녹아 없어졌고 베란다의 해바라기는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다만 채송화와 노란 들국화 꽃만이 화사하게 나를 맞이하였다. 막무가내로 고개를 숙이고 시커먼 씨를 안으로 익히고 있는 해바라기는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르고 깊이 뉘우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꽃잎 없는 관()을 쓴 채 일그러진 얼굴을 떨구어 깊이 고개 숙인 해바라기가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고상을 닮았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어떤 화관엔 미처 씨가 영글지 못해 쭉정이만 남아 손을 대면 우수수 떨어진다. 그러나 어떤 것은 야무지게 딱딱한 씨가 빽빽이 박혀 있고 어떤 것은 아직 꽃술이 떨어지지 않고 있는데 해바라기는 아마도 그런 자세로 가을을 맞을 모양이다.

  해바라기는 “양지만 쫓아다니는 기회주의자”와 같다는 비유는 옳은 비유가 아니다. 내가 보기로 해바라기는 해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해가 좋아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해바라기는 어느날 스스로 해가 된다. 그리고 저 고개 숙인 모습은 그 밝은 해의 또 다른 얼굴이리라. 캄캄한 밤의 항해 - 고통을 삼키며 안으로 익어가는 구도자의 자세와 같은 것이다.

  여름을 보내면서 나는 오늘도 해바라기의 마지막 결실을 위해 열심히 물을 주고 있다. 내년에는 좀 더 넉넉한 상자 속에 해바라기의 씨를 심을 것을 생각하면서.

 

李符永 院長

발행일 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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