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etin

한국융연구원 회보 '길'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작성자 정찬승
발행일 2005년 10월 1일
권호 제6권 2호
ㆍ조회: 4833  
IP: 222.xxx.211
西蕉칼럼 - 만남 Encounters
 

만남 Encounters

 

    성북동 연구원으로 가는 골목길에서 아침마다 늘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은 사오십대의 아줌마 들이다. 가파른 골목길을 등산하듯 올라가노라면 위쪽에서 활발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간편한 옷차림에 비닐 주머니를 들고 있거나 작은 륙색을 짊어지고 있다. 근처의 올림픽 국민생활관으로 운동하러 가는 분들임에 틀림없다. 어떤 때는 초등학교 아이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내려오는 삼십대의 어머니와 마주친다.

  언덕길을 올라간 뒤 조금 더 걸어가면 왼편으로 경신중고등학교의 운동장을 끼고 가는 울타리가 있다. 그것은 그대로 옛 성곽의 유구에 이어지는데 골목은 차 한대가 지나갈 만큼 좁다. 성곽은 기사식당이 있는 넒은 찻길로 인해 끊어지지만 길을 건너면 왼편으로 산으로 가는 성곽이 보이고 거기서 삼거리 옆을 곧장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연구원이 있는 벽돌집 6층 건물이 나온다. 나의 걸음으로 13, 또는 15분 거리이다.

   15분의 시간 중에 내가 내 나이 또래의 노인을 만나던 지점은 대개 큰 길로 나가기 전의 골목구간 안에 있다. 챙이 하늘로 향하게 운동모를 가볍게 쓰고 천천히 걷는 품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분명 아침 일찍 성북동 뒷산에 올라가 운동하고 내려오던 길이었을 터인데 요즈음 통 보이지 않는다. 무척 궁금해진다.

  한 동안은 매일 어김없이 만나는 수녀님 한 분이 있었다. 하도 자주 만나서 처음에는 목례를 하다가 나중에는 수 인사하고 명함까지 교환했는데 우리집 이웃에 새로 개설된 사비에 프랑스 학교의 교장 할머니시다. 그분도 요즈음은 보이지 않아서 궁금하다. 편치 않으신 건 아닌가. 아니 방학 때라 나오지 않으시는 것이겠지 여러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 골목길 주변에는 수녀원이 많아서 인지 수녀님들을 비교적 자주 만나게 된다. 최근에는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오륙십대의 필리핀 수녀님이 한 분 생겼다. 늘 땅을 보고 가시기 때문에 목례할 겨를도 아직은 없다.

  규칙적으로 그 길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시간에 따라 만나는 지점이 다르다. 대개는 내가 조금 일찍, 혹은 조금 늦게 집에서 출발한 탓이다. 물론 한번 보고 다시는 못 만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학교 뒷문으로 들어가는 학생들을 볼 때도 있고 못 볼 때도 있다. 만남에는 카이로스(결정적 시점)의 협동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 골목에서 나는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노란 색 유치원 차를 자주 만난다. 그리고 탈락거리며 무딘 소리를 내는 전기차를 끄는 요구르트 아줌마도.

  그러다 어느 날 아무도 아무 것도 못 만나는 날이 있다. 골목길은 텅 비어 있고 환한 햇볕이 축대며 길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 주고 있을 때.  그러나 그때도 나는 만나는 것이 있다. 돌틈으로 난 이름 모를 풀꽃, 축대 위의 호박꽃, 산딸기 넝쿨과 유치하지만 유난히 시원한 분홍빛으로 꽃피운 메꽃들이 거기에 있다.

  인생의 길목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깊게.  여러 가지 만남이 있다. 반가운 만남, 거북한 만남, 꺼리는 상대와의 만남, 그저 그런 만남 등.

  역동정신의학에서 라포르rapport라고 하는 것에 해당하는 말로서 실존분석학파에는 ‘만남’ Begegnung이라는 말이 있고 ‘만남의 체험’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수년간 환자를 보아 왔지만 아직 만난 것은 아니다.” 이런 말을 한다. “치료자는 환자와 ‘함께 체험하는 자’ Miterlebender”라고 하는 융의 말에도 같은 뜻이 들어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잠시 스쳐가는 만남이든, 자주 마주치는 만남이든, 통성명하여 서로를 알게 된 만남이든, 깊은 정서적 관계로 맺어진 만남이든, 기쁜 만남이든, 불쾌한 만남이든, 심지어 별 볼일 없는 만남 조차 그 만남에 무슨 가볍고 무거움이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모든 만남이 카이로스의 발현이라 생각할 수 있다면, 말하자면 노사연이 부르는 ‘만남’이라는 노래 구절처럼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진정 모든 만남이 소중한 것이 될 듯 싶다. 그래서 아프고, 즐겁고, 무덤덤한 속에서도 서로 무엇인가를 나누어 가지게 될 것 같다.

 

                                                          

 

발행일 권호
38 융의 어록 2007년 4월 1일 제8권 1호 8327
37 西蕉칼럼 - 길을 걷는 사람들 2007년 4월 1일 제8권 1호 5813
36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전이와 역전이 Transference and countertransferen.. 2006년 10월 1일 제7권 2호 15738
35 융의 어록 2006년 10월 1일 제7권 2호 5229
34 西蕉컬럼 - 프라멩코 춤과 처용의 춤 2006년 10월 1일 제7권 2호 5038
33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심리학적유형 (5) -직관형 intuition type 2006년 4월 1일 제7권 1호 8266
32 융의 어록 2006년 4월 1일 제7권 1호 5310
31 西蕉칼럼 - 영웅을 기다리는 마음 Waiting for genuine heroes 2006년 4월 1일 제7권 1호 4055
30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심리학적유형 (4) -감각형 sensation type 2005년 10월 1일 제6권 2호 5448
29 융의 어록 2005년 10월 1일 제6권 2호 4433
28 西蕉칼럼 - 만남 Encounters 2005년 10월 1일 제6권 2호 4833
27 분석심리학 용어해설 - 심리학적유형 (4) -감정형 feeling type 2005년 4월 13일 제6권 1호 7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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