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etin

한국융연구원 회보 '길'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작성자 한국융연구원
발행일 2009년 4월 10일
권호 제10권 1호
ㆍ조회: 2485  
IP: 211.xxx.125
西蕉칼럼 - 길을 걷는 사람들

< 西蕉 칼럼 >

 

길을 걷는 사람들

Walking on the Road

 

오규스트 로댕의 조각에 ‘걷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있다. 정확히 말해 그 제목은 ‘앞으로 걸어 나가는 남자’ 이다. 머리는 없이 몸체와 다리의 근육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걷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재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통 한 발을 내딛으면 다른 한 발은 뒤축을 약간 들게 마련인데 이 조상에서는 뒷발이 힘차게 땅을 밟고 있어 두 다리 사이의 긴장이 강하게 고조되어 있다. 분명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전한 말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로댕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서 표현하고자 한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릴케가 말했었는지는 생각이 안나지만 아마도 앞으로 가고자 하는 자세와 뒤에 버티고 있고자 하는 자세를 한 차원에 옮겨 놓음으로써 미래와 과거의 시간을 하나로 압축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듯 하다. 이로써 전진은 단순한 인과적 절차의 단면이 아니라 앞으로 감과 뒤에 버팀의 대립과 길항을 통한 더욱 확실하고 알찬 걸음이 된다. 마치 ‘보수’와 ‘진보’가 대극의 긴장을 통하여 제3의 통합과 발전을 지향하게 되듯이...

 

집이 연구원과 가깝다거나, 건강에 좋다거나, 앞집 차가 버티고 있어서 차를 빼기가 좀처럼 어렵다거나 등의 이유로 나는 차를 집에 놓아두고 걷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날씨가 나쁠 때나 짐이 무거울 때, 걷기 싫은 때도 있다. 또 때로는 차를 위해서 차를 끌고 나오는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걷는 사람들의 측에서 이들을 변호하고자 한다.

 

걸으면 좋은 것이 건강만은 아니다. 걷는 사람은 차를 타는 사람 보다 보는 것이 많다. 차를 타는 사람은 도로 표지판과 신호등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목표물이지 과정이 아니다. 모든 시야는 크게 구획되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므로 자세히 볼 여유가 없다.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눈에 띈다. 축대의 돌틈으로 난 작은 풀꽃을 눈여겨 볼 수 있고 골목 모퉁이에 새 가게가 열렸음을 본다. 낙엽을 밟고 하늘과 구름을 보며 바람소리와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아름답고 깨끗한 것만 보는 것이 아니다. 대학로의 쓰레기, 덕지덕지 도배를 한 광고지들, 가래침, 술 취한 사람들도 본다. 그러나 그러기에 깨끗이 닦은 거리, 정리된 가로수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을 마련해준 사람들의 노고에 감사하게 된다. 차로 달려가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모른다.

 

걷는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들은 날 수 없다. 그들은 오직 한 걸음씩만 갈 수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서 천천히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많은 지루함이 있고 인내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실 모든 것은 이 한 걸음으로 시작한다. 속도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마치 자기의 힘으로 빨리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무슨 일이든 인간이 하는 일은 한 걸음으로 시작된다.

 

한국 융 연구원이 창설되고 개원한지 어언 십년을 바라보는 지점에 다가가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정말 소리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 아득히 높지만 되돌아 보면 우리의 한 걸음들이 그래도 보람 있는 작은 탑들을 남겼음을 보게 된다. 인간심성의 진실을 탐구하는 도반道伴들이 있기에 우리는 외롭지 않으며 또 그렇게 길을 걷는다.

 

(西蕉 李符永 院長)

. Rhi Bou-Yong

발행일 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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