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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융연구원 회보 '길'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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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0년 10월 25일
권호 제11권 2호
ㆍ조회: 3846  
IP: 211.xxx.125
西蕉칼럼 - 청천 오수 (聽泉午睡)

서초 西蕉 칼럼

Seocho Column

 

청천 오수 (聽泉午睡)

Listening to the sound of stream while taking a nap

 

 

간송 미술관에서 도석도 (道釋圖) 전시를 본 일이 있다. 작년 가을의 이야기다. 도가와 불가의 성인들의 그림인데 성인 도인들이 하나같이 초탈한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서 흥미로웠다. 지금 화집을 꺼내서 들추어보니 도포를 점잖게 입은 성인들의 그림도 제법 있었는데 그때는 호방하고 틀을 확 깨버린 도사들에게 시선이 갔던 모양이다.

 

지팡이에 포대자루 하나 걸치고 헐렁한 옷을 입고 느긋하게 웃으며 있는 뚱뚱한 포대화상(布袋和尙). 그가 가슴과 배꼽을 드러내놓고 크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 나무 옆에 포대 내려놓고 앉아서 위를 향해 크게 웃는 안중식의 환희 포대. 대환희(大歡喜)라는 큰 글씨아래 한편의 글, 선시(禪詩)가 있다.

 

行也布袋, 坐也布袋. 放下布袋, 何等自在. (길을 가도 포대요, 앉아도 포대라. 포대 를 내려 놓는다 해도 무엇이 자재로우랴.) (백인산, 간송문화 77, 185)

 

해설자는 포대를 내려놓으면 다소 자재하리라’(放下布袋 多少自在)라는 서호 유람지의 구절을 화가가 잘못 읽은 것이라고 하지만 혹시 이것이 화가의 개성적인 생각이었거나 일종의 창조적 오류였다 해도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여기 전시된 도석화들이 절에 걸어놓아 일반 사람에게 보이는 종교화가 아니고 개인적으로 감상하는 예술작품인 만큼 화가들이 도인들의 순간적인 몸짓을 자유롭게 묘사할 수 있었다는 해설자의 말에 공감이 갔다.

 

포대화상은 중국 절강성 봉화현 사람으로 916년에 죽은 스님인데 늘 지팡이에 포대자루를 걸치고 거리에 나가 먹을 것을 구하고 잠자리를 가리지 않았다. 그 자루 속에는 온갖 것이 들어있어 중생이 원하는 대로 다 내어주어서 포대스님으로 불렸다고 한다. 길흉화복을 미리 맞추는 능력이 있었고 미륵보살의 화현인데 사람들이 그가 죽은 뒤에야 이를 알고 그의 모습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들었다고 한다.

 

포대화상(布帶和尙)뿐 아니라 다른 도인들도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노스님이 낮잠에 깊이 빠져있는 그림은 혜산 유숙의 그림인데 제하여 오수삼매(午睡三昧)라 했다. 중국 선종의 조사 달마대사가 남조의 양나라 무제와 불화로 북조 북위로 가기위해 양자강을 건넌 고사가 신화적으로 채색되어 도술로서 강과 바다를 건너는 그림들이 예부터 많이 그려졌는데 이 전시에도 그런 그림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흔한 주제가 갈대 한 가지, 입 사귀 하나에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너는 주제인데 흥미롭게도 잠자면서 건너는 주제가 많다. 잠깐 낮잠 잔 사이에 넓고 거칠은 바다를 건넜다는 말인가.

 

간송박물관은 전시 때 마다 나로 하여금 무엇인가 뜻있는 그림을 만나게 해주었는데 이번에도 나는 2층 전시실 한 구석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 하나를 발견했다. 작가의 이름을 기억했었는데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림 자체로는 별 가치가 없는지 카탈로그의 설명도 없는 그림이었다. 한 도사가 바위굴 앞에 앉아서 졸면서 그 앞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름하여 '청천 오수 (聽泉午睡)'.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든, 낮잠을 자면서 시냇물 소리를 듣든, 자면서도 시냇물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혹은 낮잠 속에서라야 시냇물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이 말의 본래 뜻이 무엇이든 그 그림과 제목은 나에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흐르는 물은 도()의 모습이다. 그 물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도의 경지에 가까워졌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눈 크게 뜨고 깨어있기 보다 가볍게 잠든 상태가 바람직하다. 말하자면 삐에르 쟈네의 정신수준의 저하 abaissement du niveau mental를 능동적으로, 또한 건설적으로 일어나게 하여야한다. 동양의 명상은 눈에 보이는 외적현상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의식의 분별지를 극도로 경계한다. 그리하여 밖으로 향한 그러한 의식의 빛을 누그러뜨리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소리를 듣도록 하는 일에 이바지해왔다. 그러기위해서는 밖으로 향한 눈을 감고 마음의 눈을 크게 뜰 수 있어야할 것이다.

 

항상 깨어있어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는 너무나 달라 보인다. 기독교의 치열한 현실참여, 옳고 그름에 대한 남달리 예리한 의식, 의를 위하여 고문당하고 목이 잘리고 돌에 맞고 화살을 맞고 죽음으로써 성인으로 재탄생한 기독교의 성인은 동양의 성자와 많이 달라 보인다. 이 너털웃음과 괴팍한 행동과 황당한 도술, 커다란 하품과 위대한 졸음에 빠진 동양의 성인 군상 속에서 나는 잠시 머뭇거리게 됨을 느낀다. 종교적인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눈감으면 코 베가는 세상, 정신 바짝 차려도 모자라는 판국에 낮잠이라니 무슨 잠꼬대 같은 말인가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바울이 깨어있어라한 것은 눈을 떠서 세상의 시비를 나의 뜻대로 가려내라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를 넘어서는 초월자의 뜻에 집중하여 그의 뜻에 따라 세상을 보라는 말이었을 게다. 바울은 인간의 자아의식의 가치판별과 현실인식을 위해서 깨어있으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기독교의 성자도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내면의 깊이로 침잠하는 도인들의 자세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것이다. 또한 세속의 옷을 벗어던지는데 서양의 성자라 해서 동양의 도사와 다를 게 있겠는가. 해탈의 방편과 표현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수행처에서 자기 마음을 살펴야 할 사람들이 자기 마음은 보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와 정의의 이름으로 남을 단죄하기에 바쁘다. 어디에 포대화상의 확 트인 웃음이 있으며, 어디에 선동(仙童)의 해맑은 몸짓이 있는가. 온통 시선을 밖으로 향해 작당하여 상대방 사람들의 옷차림이 잘못되었다고 서로 나무라고 있지 않은가. 개인 개인의 깊은 성찰과 말없는 기도 보다 집단의 요란한 깃발과 구호소리만 어지럽게 들린다.

 

청천오수聽泉午睡,- 모든 것을 수렴하는 가을의 문턱에서 짐짓 눈을 감고 저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우리자. (20107)

 

西蕉 李符永 院長

Prof.em. B.Y. R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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