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etin

한국융연구원 회보 '길'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작성자 한국융연구원
발행일 2010년 4월 12일
권호 제11권 1호
ㆍ조회: 3983  
IP: 211.xxx.125
西蕉칼럼 - '붉은 책'을 읽으며

서초 西蕉 칼럼

Seocho Column

 

 

‘붉 은 책‘을 읽 으 며

Reading the 'Red Book'

 

1913년 융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파를 결정적으로 떠난 뒤에 그가 시작한 중요한 작업은 자기 자신의 무의식과의 대화였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하기로 계획한 일이라기보다 무의식에서 폭류 처럼 솟아오르는 심상들이 그로 하여금 어떻게든 대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융은 꿈과 환상을 진지하게 받아드리고 환상 속의 이미지들과 대화하면서 그 과정을 성실하게 기술해나갔다. 꿈의 상들을 실재하는 존재처럼 상상하며 이들과 대화함으로써 무의식의 의도를 알아내고 그것을 의식화하는 ‘적극적 명상’ Active Imagination은 융의 이당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융은 그의 환상을 즐겨 그림으로 표현하여 언어로는 나타낼 수 없는 무의식의 상을 체험해나갔다. 이런 작업은 1913년에서 1919년까지 6년간 계속되었으며 이 기간을 어떤 사람은 융의 내향기라고 부르고 무의식에 대한 융의 중요한 학설이 이당시의 체험에서 싹텄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1927년까지 14년간을 융은 이 환상의 기록을 다듬고 정리하는데 이바지했다. 처음에는 검은 표지의 책, 즉 ‘검은 책’에 수록했다가 그것을 붉은 양피지로 엮은 책, 그래서 ‘붉은 책’ das rote Buch에 정성 드려 옮겨 썼다. 그러면서 거기에 자기의 환상과 관계되는 생각들을 고대 독일어체로 적어 넣었고 상징적인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 .

 

‘붉은 책’에 들어 있는 일부 그림과 글이 단편적으로 발표되고 인쇄되기는 하였으나 그 책 자체는 융의 가까운 친지사이에 알려졌을 뿐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오래동안 은행 금고 깊숙이 보존되어온 이 비밀의 책이 융 유산관리기구와 가족의 동의아래 많은 사람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80여년 만에 해설과 주석, 영어번역과 함께 출간되었다.

 

융이 그것을 좋아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하늘에서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책은 세상에 나왔고 융 심리학계에서는 일찌감치 ‘붉은 책’에 관한 강연, 세미나 등을 여러 곳에서 개최했고 앞으로 할 예정으로 있다. 나도 6월에 샌프란시스코의 융 연구소에서 초대받아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그 책에 관한 ‘동양인 분석가’의 반응을 이야기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연초 겨울방학동안 만사 제쳐놓고 이 엄청나게 크고 복잡한 책을 읽고 메모를 하곤 했다.

 

소감은 한마디로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그 체험의 치열함, 적나나함, 진실됨, 일체의 허위 의식을 용납하지 않는 순수성, 그리고 방황과 모색, 절망과 희망, 구도자의 자기고문과 시련, 그의 체험의 배경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내미는 기독교인 융의 고민, 기독교적, 아니 더 원초적인 고대 그리스와 고대 에집드, 유목민족들의 이니시에이션의 해체와 죽음과 재생의 과정에 비길 수 있는 고행의 역정, 그 가운데서도 대극의 긴장만큼이나 강열한 대극 통합, 초극의 지혜, 전체를 포괄하는 지혜가 일찍부터 표명되고 있음을 목격한다. 그노시스 사상에서 나온 것일까. 연금술사들의 생각에서 영향을 받은 탓인가. 나는 그의 환상적 상과의 대화에서 자주 노자 도덕경의 말들이 생각났다. 노자와 똑 같은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일치되는 태도를 발견하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방대하고도 자세한 주해를 한 샴다사니의 해석처럼 융이 어떤 문헌을 읽었거나 누구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다. 영향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이 인간에게 영향을 준다. 공기와 습기와 바람에서 부터 수많은 글과 사상이라는 것들, 그리고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이 어떤 사상이나 학설을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다. C.G. 융의 인간정신에 대한 통찰은 그런 영향의 산물이 아니다. 모든 것이 칼 구스타브 융이라는 인격의 그릇 속에서 용해되고 뒤섞이고 응축되어 고통스러운 진통 끝에 깊은 심혼의 아이로 새로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이해하려면 그의 이니시에이션에 동참해야한다.

 

‘붉은 책’은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 괴테의 파우스트, 단테의 신곡과 같은 영혼의 편력에 관한 불휴의 드라마, 오거스틴의 참회록에 비유되는, 속속드리 자신을 파헤친 자기고백의 서 書라 할 것이다. 다만 이것은 문학이라든가, 혹은 어떤 다른 틀에 얽매인 ‘작품’이 아니다. 철저하게 무엇이고자 하는 의도 Absicht, Intention를 배제한 자유로운 무의식의 자기개현이다. 그곳은 많은 새로운 이름과 생각과 착상들이 자유로이 표출되는 곳. 새로운 사상이 싹터 올라오는 묘판과도 같은 곳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거의 완성되어가는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 예술가의 공방과 같은 곳. 연금술사들의 비밀의 실험실처럼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이 비밀의 작업장이 이제 우리에게 공개되었고 그의 뜻을 이어받은 우리는 그 작업장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며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셈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깊은 공감과 때로는 당혹감과 거룩한 두려움으로 그가 그의 심혼을 찾아가는 지극히 험난한 여정을 중세의 순례자처럼 깊이 마음에 새기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나는 ‘붉은 책’을 다시 찬찬히 읽고 있다. 3월 부터는 한오수교수 지도아래

상임연구원들과 한국의 융 분석가들이 이 책의 독회를 시작하였다. 반가운 일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책의 첫 부분의 논평에서 융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인간의 길에 관한 소식을 보낸다. 그의 길을, 그대들의 길이 아니다. 나의 길은 그대들의 길이 아니다. 나는 그대들을 가르칠 수 없다. 길은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신들에게도, 가르침에도, 율법에도 없다. 우리 안에 길이 있다. 진실과 삶이 있다.”

 

“길을 찾느냐? 나의 길에 관하여 경고한다. 내 길은 그대들에게는 잘못된 길일 수 있다. 각자 자신의 길을 갈지어다. 나는 그대들에게 어떤 구세주도, 입법자도, 교육자이고자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 각개인은 각각 자기의 길을 찾을 지어다.”

(‘붉은 책’,<앞으로 다가올 자의 길>에서)

 

맹목적인 ‘융 모방“도, 덮어놓고 융과 다른 말을 해야 개성화라고 믿는 태도도 모두 지나치고 편향되어 있다. 그러나 인류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질머지고 내면 깊이에서 울려오는 심혼의 소리에 귀기우린 한 개척자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심혼을 더욱 진지하게 살펴가기 위해서도 매우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2010. 3. 25

西蕉 李符永 院長

Prof.em. B.Y. Rhi

발행일 권호
62 西蕉칼럼 - C. G. 융의 유산 - C.G. 융 서거 50주년을 보내며 2011년 10월 18일 제12권 2호 6015
61 분석심리학 이야기(7) - 대화 2011년 3월 31일 제12권 1호 4776
60 융의 어록 2011년 3월 31일 제12권 1호 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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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융의 어록 2010년 10월 25일 제11권 2호 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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