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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융연구원 회보 '길'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작성자 한국융연구원
발행일 2009년 10월 20일
권호 제10권 2호
ㆍ조회: 5859  
IP: 211.xxx.125
분석심리학 이야기(4) - 페르조나(1)

분석심리학 이야기 ( 4 )

 

 

페르조나 Persona (1)

 

 

‘페르조나’라는 말은 고대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말한다. 한 배우가 왕의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면 그는 왕이 된다. 신하의 가면을 쓸 수도 있고 혹은 귀신의 가면을 쓰고 귀신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는 그때그때 가면을 바꾸어가며 그 가면에 걸 맞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그 가면을 보고 그의 역할에 감탄하기도 하고 때론 그가 그 가면의 역할을 잘 못했다고 서운해 한다. 그러나 그 가면을 쓴 배우 자신은 결코 가면의 그 인물이나 존재가 아니다. 그는 전혀 다른 한 개인이다.

 

인생은 어떤 면에서 하나의 연극과 같다. 집단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집단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여러 역할을 배우가 가면을 썼다 벗었다하듯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추어 수행하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인간이 집단사회에 적응하기위하여 터득하는 사회적 역할을 융은 페르조나 라 하였다.

 

페르조나는 집단정신의 한 부분으로 자아의식이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 필요로 하는 여러 기능의 복합체, 즉 기능콤플렉스 Funktionskomplex이다. 인격의 외부로 향한 측면을 대변하기 때문에 이를 외적 인격 External Personality이라 하고 자아의식이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게 하는 관계기능이다.

 

페르조나는 그 사회집단이 공동으로 정해놓은 행동규범, 가치판단의 기준들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 ” “ 사람은 마땅히 ... 해야한다.”라는 말을 할 때 이 말은 그 집단의 모든 사람이 한 결 같이 따라야할 가치관, 지켜야할 도리와 본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만고의 보편적 진리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고 그 사회집단에서 오래전부터 써오던 인습적인 인간관으로 조금만 그 문화권을 벗어나면 쓸모가 없는 관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둘 다 페르조나를 강조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둘 다 집단정신을 대변하고 개인 개인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함에 찍힌 많은 직함, 이력서에 쓰는 사회경력, 출신학교, 근무처, 소속, 성, 연령 등이 모두 페르조나의 일부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직함이 그 사람의 존재를 수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래서 사람 이름보다도 회장님, 사장님, 원장님, 과장님, 교수님, 박사님, 장관님,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 스님, 그리고 가족 내의 위치에 따라 누구의 남편, 누구의 부인, 누구 아버지, 누구 어머니,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이라 부른다. 최근에는 직접 이름을 부르는 등 개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그보다는 가족 페르조나를 많은 사람에게 두루 적용하려는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도언니, 아저씨, 누나, 오빠로 호칭되고 있는데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페르조나의 혼란이 어디까지 진행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떻든 페르조나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늘 변한다. 낡은 페르조나가 파괴되면 새로운 풍조가 나타나서 그것이 집단적인 승인을 받아 페르조나가 된다.

 

1960년대 초만 해도 독일 사회는 권위주의와 관료주의가 아직 우세한 때였다고 기억한다. 대학주임교수의 권위가 도전 받기 시작한 때이기는 했으나 교수의 권위는 독일 스위스 모두 매우 높았다. 교수에 대한 호칭에서는 당연히 남녀의 성, 박사학위의 종류가 명시되어야 했다. 그러니까 나의 주임교수에게 보내는 편지봉투에는 헤른 프로페써 독토르 메드 쉘러 (Herrn Professor Dr.med. Scheller)라고 써야한다. 나의 교육 분석가의 한분인 융의 분석심리학의 계승자,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여사는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항상 프로일라인 독토르 폰 프란츠(Fräulein Doktor von Franz)( 박사 폰 프란츠 양 )라고 불렀고 적극적명상의 대가인 영국출신의 분석가 하나 여사는 90세가 되어도 항상 미스 하나(Miss Hannah)라 불리였다. 그 뒤에 대중문화가 우세해 진 탓인지, 여성해방운동 탓인지 유독 여자에게만 부가된 이런 구분이 없어지면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프라우Frau(부인)라고 불러주게 되었고 영어권에서는 이도 저도 아닌 미즈Ms를 써왔는데 이제는 이메일이 생기면서 그것조차 쓰기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거의 아무도 자기의 사회적 칭호를 편지에 적어 보내지 않기 때문에 이름만 보아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교수인지 아닌지, 박사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모르는 사람에게 타이틀 없이 성과 이름만 적어놓고 편지를 보내는데 무언가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고 실례를 범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 교수라는 칭호도 미국과 유럽에서 상당히 무력해지고 있다. 내가 관계하는 국제학회 중 유일하게 교수 칭호를 빠짐없이 쓰는 학회는 프랑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표현정신병리 및 예술요법학회 뿐이다. 이와 같이 세계는 페르조나를 없애고 개인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한 변화가 교양과 문화의 이름으로 바람직한 것인지는 신중하게 분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교복 착용을 폐지하고 자유롭게 옷을 입히자고 해서 그렇게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교복을 다시 입히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제복이란 옛 부터 그 사람의 신분을 표시하는 페르조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교복을 입음으로써 그 소년은 학생의 페르조나와 동일시되고 온갖 도덕적 사회적 제약을 받는다. 유럽의 정신병원에서는 급성기의 착란상태에 있는 환자 말고는 모든 환자가 사복을 입는다.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환의(환자의 제복)는 침대에 누워 있어야할 환자만 입는다. 침실이 따로 있어 집에서 일상생활에서 하는, 옷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실로 가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 양치질하고 옷을 입고 거실로 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잘 안 된다. 일상의 가족적 분위기에서 치료해야하는 치료공동체 조차 의사가 흰 가운을, 환자가 환의를 입는 경우가 있다. 정신과환자의 치료에서 사복이 주는 의미는 크다. 작은 공동체에서 사복을 입고 일상가정생활과 비슷한 환경에 있을 때 우리는 환자에게서 그가 앓고 있는 병 이외에 그, 또는 그녀의 인간으로서의 개성, 또는 건강한 부분을 포함한 전체 인격을 볼 수 있고 환자로 하여금 건강한 사회와의 접촉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장기간의 입원으로 퇴행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아직도 제복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다. 그 속에서 개인은 개인일 필요가 없다. 남들처럼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니 사회적응기술을 빨리 익혀서, 즉 페르조나를 마련해서 쓰고 다니면 된다. 그 결과 개인의식은 집단속에서 잠잔다. 그것은 매우 편리하며 집단의 일원으로 안주하는 것은 때로는 매우 달콤한 일이다. 반면에 개인의 생각을 주장하는 일은 귀찮은 일이다. 남 보다 튀는 행동을 하면 남이 나를 건방지다, 잘난체한다, 지나치게 나선다고 생각한다. 그럴 필요 있나, 등등 생각이 될 수 있는 대로 개인보다 집단의 기준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반면에 개인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문제에서는 남을 배려한다든가 남을 위해 양보한다든가 하는 전통적인 겸양지덕의 행동규범이 급속하게 파괴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극단적인 자아중심적 이기주의, 말하자면 전통적 페르조나의 상실과 그로 인한 혼란을 볼 수 있다. 그러한 혼란은 승강기 앞과 횡단보도 앞에서 일상적인 생활 도처에서 목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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